“흉년으로 굶주리는 해에 누렇게 떠서 나뒹구는 우리 백성이 누군들 왕정(王政)의 측면에서 구제해야 할 사람이 아니겠는가마는, 그중에서 가장 가련한 것이 어린아이들이다. 저 어른들이야 품팔이를 하거나 물을 긷고 땔감을 해가면서라도 살아나갈 수가 있지만, 어린아이들은 이와 달라서 몸을 가리고 입에 풀칠하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데, 울부짖으며 살려 달라고 애원해 보아도 의지할 곳이 없다.” (자휼전칙(字恤典則), 정조 7년)
정조 시대 초기에, 흉년이 들자 자휼전칙을 반포해 당시 가장 불쌍한(可矜)한 이들인 어린이들을 구제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문건을 한글로도 작성하여 널리 알렸다. 예나 지금이나 흉년이나 재난이 발생하면 그 피해는 균등하지 않다. 지금의 코로나19 재난 역시 마찬가지이다. 울산에서는 지난 4월 장애인 형제들이 부모가 일 나간 사이에 집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형제가 사망했다. 사회 서비스가 중단된 사이 발달장애인 모자가 동반자살한 사건이 제주와 광주에서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천에서 10세와 8세의 형제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온라인 수업을 하던 중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다가 화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 아팠던 이들은 더 아프고, 어린아이들은 배가 고프고 위험에 처해있다. 그리고 가정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보이지 않았던 고통
사회에서 고통받고, 아픈 사람들을 늘상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의 고통은 평시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재난에서는 그 취약성이 잔혹하게 드러난다. 감염병 재난은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치지만, 그 위험과 파급력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지 않다. 저소득층이 코로나 감염에 취약하다는 연구도 있고, 기저 질환을 갖고 있는 장애인들이 더욱 취약하다는 연구도 해외에서는 나오고 있다. 서구 사회에서 사망자의 상당수는 노인요양시설 등 집단생활시설에서 발생했다.
비단 감염의 취약성만이 문제가 아니라 취약집단에 대한 사회적 영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돌봄이 끊기고, 사회 서비스가 중지된 상황에서 취약한 사람들은 더 큰 부담을 가족 내에서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일시적으로 감소했던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져 오고 있다.
사회적 취약성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어떻게 이성, 연대, 연민을 가지고 초유의 재난에 대처할 수 있는 실력과 자원이 있는지는 이제야 시험대에 올랐다. 취약(脆弱)함은 영어의 버너리빌리티(vulnerability)의 번역어이다. 이 단어는 상처를 더 잘 받는다(wound)라는 라틴어에서 기인했는데, 단순히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처를 더 잘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취약함은 고통과 상처의 불평등성과 편차를 의미한다.
서구 학계에서는 코로나19 재난 이전에도 사회적 취약성에 대한 연구가 이미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비단 재난 상황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에 접어들며 20세기의 복지국가의 근간이었던 가족과 노동에 기반한 사회조직이 흔들리는 한편, 자연 재난이 급증하면서 기존의 사회안전망들이 사람들을 보호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필요에서 비롯되고 있다.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 취약성은 질병의 차원과 사회적 차원 모두 세밀하게 분석이 되고, 이에 대한 문제의 가시화, 데이터의 수집, 정책적 개입 등이 시급히 이루어지고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인천의 형제도 가구 단위로 받는 생계 지원들을 받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배가 고파서 새벽 3시에 편의점을 전전하고,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자기들끼리 라면을 끓여 먹다가 화상을 입었다. 가족이란 사회 단위는 더이상 취약한 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때로는 아동폭력 등 위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기존의 사회안전망 역시 이들을 보호하는데 무력했다. 유례없는 재난에서 아이들은 더 불쌍하다. ‘천지가 만물을 태어나게 한 본연의 뜻(天地生物之意)’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린 생명에 대한 보호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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