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순 시인 네 번째 시집 ’왼손을 위하여’ 출간
이예지 | 입력 : 2021/02/09 [17:47]
소외를 극복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네 번째 시집 “존재의 회복을 모색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보다 개진된 면모 보여”
왼손을 위하여/조성순 지음/천년의시작/ 1만원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이는/ 천재라 생각했다/ 내게는 멀리 있는 왼손이/ 그에게는 바른손이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던 누이는/ 밥상머리에서/ 자주 쥐어박혔다/ 어데서 못된 것 배웠느냐고//…멀리 있는 왼손을 알고 싶어서/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삼 년이 지나자/ -왼손잡이시군요?/ 어른들이 뭐라 안 하시던가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가문이 너그러웠지요”/ ‘왼손을 위하여’ 일부
조성순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왼손을 위하여’를 출간했다. 표제시 ‘왼손을 위하여’는 익숙한 오른손 대신 배제된 왼손을 사용하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기존의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본질적 존재에 대한 고된 탐색 과정을 시적 언어로 승화시킨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이전 시집들에서 보여 주었던 산업화 이전의 전통적 농촌 사회의 토속성을 이어나가면서도 존재의 회복을 모색하는 방법에 있어서 보다 개진된 면모로 진정한 의미의 ‘실존’을 모색한다.
“땅거미가 오고 있는 고샅길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잎 진 우듬지의 알몸에 감들 매달려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햇빛이 비치면 달린 감들 등불 모양 잠시 환해집니다//…어둠 저쪽 희미한 등불 하나가 고샅길을 따라옵니다/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등불을 내려놓고 들고 온 걸 꺼내서 나무 밑둥치에 척척 바릅니다/ 팥죽입니다//…다음날 별들이 눈을 떠 초롱초롱할 즈음 동구 밖이 환해집니다/ 오르막길 부르릉 자동차는 힘을 냅니다/…감나무 앞에 멈춘 차에서 신사와 부인과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내려 한참을 서있다가 다시 떠납니다//…고샅길 감나무 한 그루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동지무렵’의 일부
‘동지 무렵’은 붉은 팥죽을 쒀서 악귀를 몰아내는 세시풍속을 형상화했다. 가족의 평화를 빌며 감나무 밑둥치에 팥죽을 바르는 행위와 타관에 살던 가족이 고향을 살피러 오는 것 등을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 여기서 감나무는 이들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는 매개자인 우주수이다. 하늘은 나무를 통해 가족의 유대와 안녕을 받아들인다. 산문시로 자동차 불빛에 나무 밑둥치가 설핏 보이게 하고 다시 고요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감나무는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수작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자연과의 교감은 내성천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내성천변 사람들이 여름날 더위를 피해 모래밭에 나가서 대소사를 담소하며 자는 모습, 하늘에서 은하수가 드리운 풍경, 이들의 소망을 강둑에 있는 둥구나무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물욕을 벗어나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공동체적 모습을 구현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가 투사돼 있다.
“사슴벌레 모양 늘 조용히 지내던 아이가 여러날 학교를 나오지 않아 주소를 들고 물어물어 찾았습다//…루핑으로 덮인 지붕으로 빗방울 듣는 소리가 아팠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말수가 없었습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몇 번 삼켰습니다//…꽃이 지고 새잎이 나도 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루핑 지붕도 없어지고 루핑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도 가셨습니다. 그러나 내 가슴의 루핑 지붕엔 가끔 빗방울 듣습니다” ’가정방문’일부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요 여행이라고들 한다. 연극이란 관점에서 보면 시인은 오랫동안 교사라는 배역을 했다. ‘코스모스 코스모스’ ‘가정방문’ 등에 잘 드러나 있다. 시들은 가난 탓에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아이와 가출한 제자에 대한 스승의 안타까움을 담았다.
‘아름다움에 대한 일고’에는 히말라야 고산트레킹 경험 때 관찰한 산양 떼의 행위에서 혹은 작고 가여운 바람꽃의 일렁임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 여행의 과정에서 인간생활 편의의 산물이 플라스틱이 환경재해의 주범임을 ‘플라스틱’에서, 문명의 이기가 생활 깊숙이 침투한 것을 ‘어느 날 인공지능이’에서 고발하고 있다.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것을 시로 형상화했다. ‘카파도키아’ ‘흑해’ ‘모아새’와 같은 시는 말할 것도 없고 ‘수세미를 사다’ ‘춤추는 분수 광장’ ‘화장실에 갇히다’는 제각기 태국 치앙라이, 아르메니아 예레반, 조지아 여행의 추수이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최성침은 “여전히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전력을 다해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전사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시인 도종환은 “이번 시집을 읽으며 ‘물자작나무 껍질에/ 밤새껏 쓰는/ 바람 편지’ 같은 시를 발견하게 되어 기쁘다. 고해의 바다에서 사느라 많이 흔들리면서도 생동하는 기운을 잃지 않고, 미망 속에서 길을 찾아가면서도 담백한 자세를 지니고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그의 상상을 따라가는 길이 즐겁다. 여름에도 눈이 내렸다는 내성천, 그리운 것들이 다 모여있는 옛집, 인디언 달력 같은 그만의 십삼월, 찬바람 몰아치는 세상에서도 오래 기억하는 따뜻한 온기가 내면을 채우고 있어서 좋다. 그의 상상을 따라 과거로 가도 맑고 서늘하며, 미래로 가도 흥겹고 신난다. 부디 백석이 살던 동네에 정착하여 살다가 우리를 초청하여 왁자하게 저녁 시간을 보내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썼다.
조성순은 ”네 번째 징검돌이다. 개여울 저편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앞을 보고 가만가만 걷는다. 희미한 불빛 한 점 설핏 보인다”며 출간 소감을 밝혔다. 경북 예천 출생으로 2004년 ‘녹색평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목침’ ‘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나는 걸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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